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6 사건 (문단 편집) === 취조 ===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김재규를 호송하던 마이크로 버스가 [[반포대교#잠수교|잠수교]]에서 전복 사고를 일으켰는데 차가 뒤집어질 때 기절한 보안사 수사관 신동기 육군 [[준위]]가 정신을 차려 보니 김재규가 엉덩이로 신동기의 머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김재규가 "아이고 내가 신 선생을 깔고 앉았구먼. 미안하오." 라며 비켜주자 수갑이나 포승줄이 없어서 김재규가 도주하지 못하게 바지춤을 잡고 있던 신동기는 "부장님 어디 도망가시면 안돼요" 라며 손을 놓았고 김재규도 "내가 어딜 도망가나. 빨리 (전복된) 차나 세우시오" 라면서 조용히 호송에 응했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를 태운 버스가 전복사고를 수습한 뒤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 30분 쯤이었고 김재규는 피의자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여담으로 10.26 사건으로 압송된 김재규가 수사를 당한 보안서 서빙고 분실은 다름 아닌 김재규 자신이 보안사령관 시절 만든 곳이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내가 각하를 살해했다. 이제 세상은 다 끝났다. 수사관 자네들도 살 궁리를 찾아야 돼.' 김재규는 또 정승화도 사건현장에 있었고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왔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니 수사관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으며 내일 아침이면 우리가 반혁명분자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다. 보안사는 방첩기관이지 전문 전투부대, 방어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상황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전투부대라도 들이닥친다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권위주의 정부 당시 중앙정보부(안기부), 보안사령부가 위세를 떨쳤지만 그들의 순수한 전투력은 수도경비사령부보다 열세였다. 12.12 당시 전두환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애초에 보안사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이송한 것도 대장이 끌려간 것을 알면 중앙정보부가 기습을 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보안사 정동 분실과 중정 정동 분실은 나란히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 [[이학봉]] 수사과장이 나서서 수사관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이학봉은 이렇게 말했다. > '우리 손에 지금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 목숨을 걸고 수사를 철저히 하여 빨리 김재규의 공모자를 색출해야 한다.' 그러나 김재규는 과거 보안사령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다들 전관예우로 쩔쩔맸다고 한다. 심지어 취조실로 들어와서는 '부장님, 부장님'이라고 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수사관도 있었다. 그러자 이학봉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로 호송해온 신동기 준위를 불렀다. > '당신이 데리고 왔으니 책임지고 조사하시오.' 키는 작지만 온갖 무술에 능하고 간이 큰 신동기 준위는 이왕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보아야 할 상황이라서 취조를 무식하게 밀어붙였다. 김재규를 호송해 온 신동기 준위는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6개월 과정 정보교육 수료 시 성적 우수자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고 김재규를 정동 분실[* 현 세종대로 21길 TV조선 별관 건물]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정도 들었는지라 김재규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김재규와 공모한 반란 부대를 알아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수사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자백을 빨리 받아내는 방법은 고문이었다. 신동기는 안면을 몰수하고 이때부터 한 30분간 김재규를 '''[[고문|거칠게 다루었다.]]''' > 신동기: '어이, 김재규, 솔직히 이야기하자. 어느 군부대를 몰고올 거야. 우리도 알아야 손들고 항복할 것 아닌가. 어느 부대랑 결탁했어?' > 김재규: '없습니다. 단독으로 시해했습니다.' > 신동기: '미국과 손잡았나.' > 김재규: '아닙니다.' 이때 김재규는 쇠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가 두들겨 맞고 바닥에 나뒹굴 때마다 스스로 의자를 바로 세운 뒤 자세를 딱 바로잡고 앉아서 다음 타격을 기다리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학봉 중령은 김재규가 동원한 부대가 없다고 판단했던지 신동기에게 '그만하고 나오라'고 했다. 이후에는 정식 신문이 시작되었다. 심문 도중 김재규는 신동기 준위의 주먹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는데 위 현장 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고문을 심하게 당한 김재규는 피하출혈이 생겨 멍이 들자 신동기 준위는 이를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일단 고문을 중단시켰다. 이후 김병수 장군을 불러 김재규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다. 김병수 장군이 서빙고의 심문실에 들어가니 김재규는 반가워했으며, 진찰해 보니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고 간이 나쁜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이었고 한다. [[http://realty.chosun.com/site/data/html_dir/1997/12/20/1997122070302.html|#]] 27일 새벽 1시 직전에 육군본부 벙커에 육군 헌병감 김진기 장군이 총장실로 오더니 김재규 체포완료 보고를 했다. 정승화는 국방부장관실에 있는 김계원 실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승화는 한참 있다가 국무회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국방부로 가던 중 복도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났다. 전두환은 쪽지에 쓴 메모를 보여주면서 '김재규가 압송차 안에서 횡설수설한 걸로 보아서 범인이 틀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세상에 중정부장이 각하를 시해했다니...'라고 말하면서 어이없어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으로부터 수사계획을 보고받은 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갔다. “김계원 실장이 각하 시해장소에 김재규와 같이 있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연행을 해서 조사를 해야겠습니다”라고 하니 장관도 동의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연행지시를 했다. 그 직후 김계원 실장이 장관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정승화는 그의 모습을 보니 도망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전두환에게 '연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정승화 총장의 1979년 11월 1일자 참고인 진술서. 김계원은 이틀 뒤인 29일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이학봉은 27일 아침 김재규에 대한 1차 심문결과를 수사관들로부터 보고받았다. 수사관들은 시해현장에는 김계원 실장뿐 아니라 정승화 총장도 있었다고 보고하면서 두 사람을 연행해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날 오전 11시 이학봉 수사과장은 오희명 과장과 함께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에게 수사보고를 했다. 이학봉 중령은 김계원, 정승화 두 사람을 구속하여 수사해야겠다고 건의했다. > "처음엔 (전두환 사령관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막 문쪽으로 걸어가는데 다시 부르더니 '김계원 실장은 구속 수사하라. 그러나 정승화는 어제 계엄사령관이 됐으니 함부로 할 수 없다. 지금부터 극비리에 내사를 더 해봐라'는 취지로 지시했지요." (5·18사건공판기록) 이학봉 중령이 전두환 소장에게 정승화 총장에 대한 수사필요성의 이유로 적시한 내용은 이러했다. > '육군총장이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신수습과 범인색출을 한 흔적이 없다, 청와대를 포위시켰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5·18사건공판기록)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이렇게 생각했다. >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육군참모총장이 공모한 조직적인 내란이다. 완전한 혁명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정 총장을 구속하면 배후세력에 의해서 또 다른 내란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5·18사건공판기록). 이때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시해 사건 현장 부근에 김재규의 초대로 와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김재규가 단독범인지 여부가 불투명한 시점에서 전두환 소장과 합수부 수사관들은 일단 정승화를 공범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불과 7시간이 흐른 시점에 전두환과 합동수사본부에 이런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전두환이 정권탈취에 대한 야심을 가졌다고 보기 힘든 시점에서 그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권력자로 등장한 계엄사령관을 구속해야할 조사대상자로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12.12 군사반란|12.12 사태]]로 가는 길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